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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Note] 사진찍기 기록

by 여기는 정글 2024. 3. 27.

1

1-1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웃는 남자>

 

황정은의 소설 <백의 그림자>(2010)<웃는 남자>(2017)에는 세운상가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각각의 소설에서 세운상가의 묘사는 다르다.

<백의 그림자>(2010)
- 그야말로 빽빽하다. 라고 생각한 뒤엔 아무런 말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눈앞이 빽빽했다. 그 속에서 전구를 파는 노인은 숱 많은 머리칼이 모두 하얗게 세어 버린 칠십 대 노인이었다. 그는 벽돌만 한 골판지 상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선반을 등진 채로 나무 책상과 걸상을 놓아두고 있었다.
- 나동의 남쪽 외벽과 엘리베이터 곁엔 사십 년 된 나동이 아직 장사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십 년은 더 장사를 할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현수막과 알림 쪽지가, 어째선지 몹시 더럽혀진 채로 붙어 있었다.


<웃는 남자>(2017)
- 내내 고장난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그의 수리실은 세상 적막한 곳에 당도해 있었다. 인기척 없는 황무지 기슭에.
- 여소녀는 그 스산한 광경을 상상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목에 소름이 돋고 몸이 떨렸는데 그게 그 터무니없는 상상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d는 상가를 돌아다니는 동안 곳곳에서 균열을 보았다. 당장 이 계단은 올여름 폭우에 철골만 남고 사라져버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꼴을 하고 있었다. (중략) 그러나 여기 이렇게 균열들이 있다. 멀쩡하다는 것과 더는 멀쩡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앞면과 뒷면일 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믿음은 뒤집어지고, 거기서 쏟아져 내린 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지저분해질 것이다.

 

<백의 그림자>에서 <웃는 남자>까지는 7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7년 사이의 세운상가는, 그리고 한국사회는 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을 겪어내고 견뎌왔다. 소설에서 묘사한대로 2017년의 세운상가는 가게들이 온라인으로 모두 옮겨가면서 사람들이 많이 빠진 장소이다. 그래서 텅 비어있고, 균열이 가있다. 한국사회의 트라우마적인 사건들을 경험한 독자들이라면 두 작품을 비교하여 읽을 때 어떤 간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사이의 간격은 또 다른 의미들을 준다. 나의 옆에 있는 많은 것들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에 대한 질문들이다. 빽빽함과 부서짐의 감각의 차이/간격은 나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며, 이번 작업의 출발 지점이었다.

 

1-2 <우리집 컵이 깨지고 있다>, 749

<우리집 컵이 깨지고 있다>2019-1학기 [단편영화제작기초] 수업에서 만든 단편영화이다.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이 영화는 지표성과 영화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이은 작품이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며 지표성을 잃은 아카이브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또한 (충돌로서의 몽타주가 아니라) 편집 그 자체로서의 몽타주가 연속성의 환상을 조작해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각각의 이미지들을 통해 나는 새로운 감각을 마련하는 공간들을 제시하였다. 그 공간에 그것이 정말로 있으며,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오는 지표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환상으로 펼쳐지는 서사와 이미지의 관계에 집중하였다. 따라서 기묘한 우화와 같은 서사와 비슷한 무게로 병렬되어 보이는 이미지들은 각기 또 다른 텍스트를 불러오지만, 다른 것들을 지우고 배제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사진과 홀로그래피2] 수업에서는 다시 필름으로 돌아갔다. 이는 지표성의 의미와 영상이 아닌 사진이라는 점에서 편집에 대한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로 남았다. 따라서 경계에 대한 감각과 간격, 그리고 필름 카메라라는 매체 특수성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2

2-1 이미지 선정 과정

얼마큼 울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오정미 시나리오 작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사실 맘껏 울고 싶은데, 울다보면 또 그렇게 진지한 자신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일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울음을 그쳐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나는 이 인터뷰에 깊게 공감했다. 우리는 늘 경계에 위치해있다. 경계 사이에서 무결점하고 확실한 무언가가 되길 요구받는 존재들은 어디에 속할 수 없는 틈 사이에 껴서, 해내지 못하면 버려진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불안을 감각하고 있는 것이다.

 

틈 사이에 낀 존재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 쓸모없다고 여겨지고, 금세 버려진다. 낡은 동네가 부셔져서 재개발이 되고, 비정규직이라는 명목 하에 몇 개월 채용되었다가 다시 해고되며, 젠더가 다르다는 이유로 부당한 일들을 많이 겪는다. 경계에서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런 질문을 갖고 먼저 버려진 것들을 찍었다.

두 사진은 20191030일에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다. 왼쪽 사진은 느슨하게 늘어져 있는 접근금지 테이프 뒤에 있는 버려진 것들을 찍었다. 두 번째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연극원 무대미술과 학우들이 무대를 위해 제작한 뒤에 남겨진 쓰레기이다. 무대를 위해 만들어진 소품들은 떠나고 그 뒤에 남겨진 것들을 찍었다. 그러나 두 사진을 찍고 나서 고민이 되었던 것은 지표성에 대한 문제였다. 두 장면이 분명 경계 공간과 버려진 감각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연결 짓기가 조금 어려웠다.

 

2-2

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가 대상의 동일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운동성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찍은 사진이 오직 그 장소의 이미지를 담는다는 의도를 강제하지 않는다면 사진 내부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장소가 분명 우리 일상에 있는 현실이긴 하지만, 어쩌면 동시에 잉여의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미술원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며 한 장의 사진에서 관계들을 발생시킬 수 있는 이미지를 찾아보았다. 이 과정에서 사진에서 남겨둘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문동 재개발 현장을 찍기로 결심하며 계속해서 든 고민이 있다. 내가 왜 이 이미지를 남겨두는지, 왜 버리는지. 또한 내가 이 장소를 사진으로 담는다는 것이 과연 이 장소의 기억을 담는 것인지 혹은 쏟아지거나 부셔지는, 곧 사라질 감각을 담는 것인지 어려웠다. 혹은 이것이 과잉의 이미지가 아닌지.. 분명 이 모든 속성은 겹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애매한 지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가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다.

 

균열을 포착하며 사진으로 곧 사라질/사라진 장소를 아카이빙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카이브는 하나로 통합되는 서사에 맞는 기록이 아닌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실제의 모습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이미지 아카이브의 기록이 오늘날에는 과잉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많이 보존하는 것. 바로 그 잉여적인 지점에서 아카이브의 의미가 결정된다고 본다. 문제 의식을 갖고 이미지를 포착하지만 그 이미지는 꽉 차거나, 부족해서, 혹은 너무 흘러 넘쳐서 과잉의 이미지이다. 이 과잉은 나의 해석과 의미를 넘어서게 된다. 이는 해당 작업에서 무언가를 기억하는 태도로 제시된다. 따라서 나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관람자는 그 사진 내부의 관계성을 찾을 수 있다. 그곳에서 다시 발생하는 감각들이 개인 혹은 공동의 기억을 발생시킨다. 기억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서 가능한 언어는 무엇일까?

 

3

대형카메라를 수레에 싣고 미술원 후문을 나왔다. 210mm렌즈와 ISO100 4x5필름을 사용하여  F16 T1/8  F11 T1/8로 찍었다. 검은 천을 뒤집어 쓰고 루프로 초점을 맞춘 뒤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조정했다. 셔터를 닫고 릴리즈를 눌러보는 연습을 많이 한 뒤에 필름 홀더를 열고 찍었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과 대형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것의 차이점은 수레를 끌고 가야하기 때문에 거리의 제한성이 있다는 점, 설치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시간을 잘 계산해야 한다는 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있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 노출값을 대형카메라가 아닌 다른 카메라로 많은 시도를 통해서 정해야 한다는 점, 필름 홀더를 주의하여 열고 닫아야 한다는 점, 현상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 등이 있었다. 꽤나 번거로운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대형카메라로 찍어야 하는 이유는 필름이라는 매체가 갖는 의미(그것이 정말로 그곳에 있다), 화질이 정말 좋아서 작은 부스러기까지 모두 보인다는 점,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이의 공간에서 부셔지고 쏟아지는 감각을 포착하는 데 효과적이다.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고민을 완전히 해결할 순 없었지만, 나름의 답으로 사라질/정지된 공간을 찍으면서 그 안에 있는 관계성을 함께 포착하고자 했다. 재현의 문제에서 오직 그것들이 내가 의도한 바대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폭력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틈새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 움직임 등을 포착하고자 했다. 막아놓은 천 사이에 튀어나온 나무와 늘어진 전깃줄과 팽팽한 출입금지 테이프가 그것이다. 이 공간들을 찍은 후 며칠 뒤에 다시 가보니 첫 번째 사진의 집과 나무는 사라져있었고 두 번째 사진의 공간은 그대로였다.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빽빽하게 찍었던 사진의 공간은 사라지고, 노출을 너무 많이 줘서 하늘의 전봇대의 선마저 흐릿하게 찍은 공간은 그대로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촬영의 과정(편집의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잘라진 부분들과 사라진 부분들은 우연적으로 사라지고 남아있다. 말하지 못했던 것이 말해지거나 막혔던 것이 쏟아지거나 버려질 때 기억과 감각은 발생한다.

46.5x58.8cm / 46.2x58.9cm

 

4 참고문헌

백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0.

웃는 남자, 황정은, 은행나무, 2017

#아카이빙, #몽타주, #동시대성: 역사 인식 방법에 대한 몇 가지 단상,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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