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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 시대의 영화를 소개하며 발걸음이 미술관의 전시실로 향한 것은 어색한 걸음이 아닐 것이다. 영화와 미술작가의 영상 작품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키워드는 상투적인 말이 되었으며, 구분해 놓은 틀 안에서 작품을 어디에 위치시킬지에 대한 고민으로 그치는 것은 시각예술에 대한 언어의 부재로 여겨진다. 영화감독에게도 미술작가에게도 카메라는 매우 중요한 매체가 되었으며 작업 공정도 매우 흡사하다. 또한 이들이 촬영한 영상은 끝없이 합성, 왜곡, 변형되며 재생산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그 구분에 집중하기보다 박찬경의 전시 《모임 GATHERING》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상 작품 자체의 특이성과 영화의 관람 경험에 집중하였다. 박찬경 전시를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어두운 상영실에서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관객의 관람 경험을 분석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박찬경 작가가 영화감독으로도, 미술작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동시대에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5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박찬경의 전시 《모임 Gathering》의 영상작품과 영화를 관람 경험과 각 영상 작품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더불어 생각해볼 논의들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1-1 <늦게 온 보살>을 중심으로, 관람 경험
5전시실에서 작품을 관람한 후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작품이 다시, <5전시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 5전시실의 1:25 건축모형-이라는 점은 박찬경이 ‘관람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찬경의 영화 <늦게 온 보살>(2019)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5전시실의 중앙에 위치한 상영실에서 정각마다 상영된다. 우리는 전시실에 들어가 <늦게 온 보살>이라는 영화를 보기 전에 여러 영상 작업을 비롯한 작품들을 관람하는데 그 경험은 영화를 볼 때 사전 정보가 된다. 상영실로 들어가는 입구 좌우에 있는 <주련>은 지옥에 관한 동서양의 두 글귀로 <늦게 온 보살>을 해석하는 두 개의 상반된 관점이기도 하다. 그 사이로 상영실을 들어가게 되면 기존의 극장처럼 어두운 방 안에 스크린이 있다. 극장과의 차이는 1) 세 줄로 나열된 의자의 높이가 같아서 앞 사람의 머리를 잘 피해가며 영화를 봐야한다는 점, 2) 정각마다 상영하기에 시간을 일부러 맞춰 들어가지 않는 이상 영화가 이미 시작한 상황에서 들어가 영화를 봐야 한다는 점이다. 3)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가는 관객들 사이에서 영화를 관람한다. 또한 4) <늦게 온 보살>을 상영하는 공간 입구에 관리자가 서있다.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면 계속해서 그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암실에서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작용하는 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 계속해서 방해가 된다. 상영실의 관객은 <늦게 온 보살>의 주인공에게 동일화하지 않고 거리를 두며 자신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중간에 들어왔다고 해서 영화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중간에 나간다고 해서 영화를 감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영화를 관람할 때 앞서 전시에서 보았던 작품들, 특히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와 짝을 이루며 방사능, 자연 등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영화는 기대했던 이 모든 이미지를 뒤집으면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한다(영화의 이미지들은 이후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늦게 온 보살>을 관람하고 나온 이후에 펼쳐지는 작품인 <모임>의 사진들과 설치된 <맨발>은 영화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늦게 온 보살>에서 애도를 표했던 얼굴은 <모임>에서 슬퍼하는 각종 동물의 얼굴로 그려져 있고 그 사진이 전시된 벽은 다른 작품과는 대조적으로 화려한 색감을 강조한다. <모임>이 배열된 장소 가운데에 <맨발>이 있다. 영화에서 늦게 온 보살을 향해 쑥 내밀어졌던 발은 <맨발>에서 기계 장치로 그 뼈대만 남겨놓아 단순하고 현대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관람자는 영화에서 봤던 이미지와 관계를 이루며 작품을 감상하는데, 영화에서 보여준 애도가 화려한 장식성과 기계적인 물질성으로 감각되는 것이 역설적이다.
1-2 《모임 Gathering》의 창
《모임 Gathering》의 관람경험에 또한 주목할 것은 ‘창’이다. 먼저 입구로 전시실을 들어와 우리가 보는 것은 <작은 미술관>이라는 작품이다. 말 그대로 담장 높이로 박찬경이 선별한 작품이 전시된 ‘작은 미술관’을 보게 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가벽의 중간에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창이 있다는 점이다. 그 창을 통해 다음 가벽과 그 너머의 전시장을 포착하게 된다. 작품을 보다가 그 창을 보는 순간 관람자는 이곳이 미술관이라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공간 자체가 하나의 작품임을 발견한다. 동시에 그 창은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서 장면이 달라진다. 즉 관람자는 자신이 어디를 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에 서게 된다. 두 번째 창은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와 <세트> 사이에 있는 창이다(사진5,6). 관람자는 두 작품이 나란히 상영되고 있는 것과 두 스크린 사이에 창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만큼 창의 폭이 좁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와 <세트>가 상영되는 스크린 앞의 의자가 아닌 두 스크린의 중간에 서서 창문을 마주하게 되면 5전시실의 마당이라고 불리는 곳에 위치한 <해인>을 볼 수 있는 창인 하나의 채널이 추가된다. 따라서 중간에 선 관람자는 어떤 스크린을 볼지 선택할 수 있을뿐더러 창을 통해 작품을 관람하며, 돌아다니는 다른 관람자까지 구경할 수 있다.
두 창은 불투명성의 논리이면서 투명성에 대한 비매개의 욕망이며, 하이퍼매개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비매개는 미디어가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 그 미디어의 목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창은 실제 장소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투명성을 욕망하지만 그 주변에 있는 미디어들에 의해서 그 욕망은 계속해서 방해받는다. 특히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와 <세트>는 창을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이미지를 바꾸고 있으므로 관람자는 이 미디어가 ‘전시실’의 벽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동시에 이와 같은 배치는 하이퍼매개의 논리를 가져온다. 볼터와 그루신의 글에서 “하이퍼매개가 이질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표상이 세계를 보는 창문이 아니라 오히려 창문 자체라고 한 점”은 이 전시에서의 창을 하이퍼매개와 연결 짓는 논지를 뒷받혀준다. 데스크톱 인터페이스의 윈도 양식처럼 주체로서 관람자는 세 채널의 다중적 표상을 볼 수 있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이 공간/작품에서 비매개와 하이퍼매개의 두 가지 논리는 공존한다.
또한 두 번째 창에서 보이는 작품이 <해인>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해인>을 전달하는 방식은 우리가 앞서 살펴 본대로 디지털 하이퍼매개와 공명하지만, 작가가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것은 동시대의 데이터 만능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관람자는 창을 통해 그런 아이러니한 전시실이라는 장소 혹은 작품과 상호작용한다. 두 개의 창은 매개의 신호를 만들어 풍부한 감각체계를 생산하며 창을 중심으로 두 개의 영상/사진 미디어와 함께 이루어진 장면은 디지털의 속성처럼 계속해서 분절하고, 융합하는 시도를 한다. 관람자는 문화 생산물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산해야 하는 요구를 받는다. 이 창을 둘러싼 장면을 통해 개별적, 파편적, 다층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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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2019)
- 디지털 이미지로 전환한 필름 사진, 오토래디오그래피, 글, 슬라이드 연속 상영, 24분 40초.
피폭된 사물을 이미징 플레이트에 노출시키면 방사선의 잠재적 상이 만들어진다. 이를 스캐너에 넣고 특수 레이저를 쏘이면 방사선량에 비례해 빛을 방출한다. 그 빛을 기록한 이미지가 오토래디오그래피이다.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는 일본의 사진가 카가야 마사미치(Masamichi Kagaya)와 식물학자 모리 사토시(Satochi Mori)가 후쿠시마 지역에서 채취한 다양한 생물, 사물을 ‘오토래디오그래피‘로 만든 이미지와 박찬경이 2019년 후쿠시마에서 찍어 온 사진들이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박찬경이 후쿠시마에서 찍어 온 사진들은 인적이 끊어진 어느 봄날의 시골 마을이다. 오토래디오그래피와 사진 중간에 이미지에 대한 서술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 서술과 오토래디오그래피는 냉정하게 전해져 봄날의 감각을 계속해서 분절시킨다.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는 원전 사고 이후의 후쿠시마를 담고 있다. 방사능으로 인한 물리적 피해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그 인과관계가 불분명하게 드러난다. 이한범의 글은 원전사고의 재난 이미지가 대표적인 장면으로 치환될 수 없다고 보고, 재난 상황이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므로 보이지 않는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방사능으로 덮인 후쿠시마의 재난 이미지는 기존의 시각적 재현 방식이 완전히 무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찬경이 찍은 사진에서 방사능의 비가시성은 오토래디오그래피의 교차를 통해 보완되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오토래디오그래피의 비실재성(X-레이 투시도와 같은)은 목적하는 바를 계속해서 어긋나게 만든다. 여기서 후쿠시마의 사진이 35mm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필름과 디지털의 지표성 논의에서 필름은 그 장소들이 ‘정말 그곳에 있다‘고 말해진다. 필름은 재난이 훑고 간 장소를 소환해내지만 그것이 디지털 이미지로 전환되었다는 사실과 그곳에서 채취한 생물과 사물의 방사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2-2 <세트>(2000)
- 사진, 슬라이드 연속 상영, 13분 40초.
북한의 조선영화촬영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세트장, 군대의 시가전 훈련장의 사진들을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시간 순서로 배열해 허구적인 연대기를 구성한다. 관람자는 나열되는 사진으로 시공간을 식별할 수 없다. 이미지 속에서 실제 장소의 지리적 좌표와 맥락은 해체되고 시간은 각각의 개인에게 다르게 작용한다. <세트>를 설명하는 글에서는 “북한 조선영화촬영소의 세트가 서울을 모방하고 있지만, 보통 사람은 갈 수 없는 북한에 있는 곳이고, 오직 노인들만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과거 서울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1970년의 서울 같기도 하고 북한의 현재 같기도 한 이미지 아카이브는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시공간을 구성한다. 텅 빈 풍경과 함께 다시 재구성되는 해석은 작가의 해석과 의미를 넘어서기도 한다.
2-3 <늦게 온 보살>(2019)
- HD 영화, 흑백, 4 채널 사운드, 55분.
영화의 이미지는 네거티브 방식을 택한다. 빛을 받으면 더 어두워지고, 어두운 곳은 밝게 보인다. 산에 오르는 중년 여성과 산속의 방사능 오염도를 측정하고 다니는 여성, 하나둘씩 숲 속의 컨테이너로 모이는 사람들. 느슨한 관계인 이들이 모여서 컨테이너를 둘러싼 공간은 애도의 공간이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영화를 보며 <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와 짝을 이루며 방사능, 자연 등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이후 컨테이너에 불을 붙여 제의를 치르는 그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 얼굴에 집중하는 이유는 영화가 내내 네거티브 방식을 취하다가 관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그들의 얼굴을 한 명씩 보여줄 때만 흑백 이미지로 바뀌기 때문이다. 네거티브 이미지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들은 갑자기 그들의 생생한 얼굴(흑백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느껴진다)을 마주할 때 당혹스럽다. 이제까지의 이미지가 실재인지 헷갈리다가 전환되는 그 순간에 그 이미지가 실제로 찍은 영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재난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모이는 이들은 아무런 목적성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인물들은 애도의 공간에 단지 ‘모인다’. 인물이 기능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의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오히려 어떠한 목적성도 없는 인물들이 모여서 컨테이너 내부와 외부를 꾸미고, 제례를 치르며, 불을 지르는 행위가 대상의 재현을 벗어나 상황의 구성으로 다시 짜여진다. 이 허구는 재난이라는 현실을 재구성하며 비가시적인 풍경을 수면 위로 떠올려 보낸다. 재난의 이미지는 흑백으로 보여졌던 얼굴에서 다시 네거티브 방식으로 돌아와 그들이 지르는 불로 보여진다. 이 장면은 또다시 실제로 촬영한 것인지 헷갈리게 되는데, 이것이 박찬경이 보여주는 재난의 이미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 이미지는 9/11과 같은 스펙타클한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와 허구를 구별할 수 없는 이미지이다.
3. 재난, 이후의 언어
박찬경은 후쿠시마 쓰나미와 원전 폭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재난 이후 어떤 언어가 가능할지에 대해서 묻고 있다. 시골의 초라한 산신당과 칠성각에서부터 시작한 전시는 거대한 현대미술관으로 확장하여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묻기도 하고, 석가모니와 그의 제자 사이에 있었던 작은 사건을 불러와 재난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기계로 만드는 구원(<늦게 온 보살>), 코믹해지는 제의(<늦게 온 보살>, <모임>), 유치한 기복에 담긴 숭고(<모임>, <병풍>), 재난을 능가하는 자연미(<후쿠시마, 오토래디오그래피>, <해인>) 등 이런 저런 역설과 아이러니의 언어“를 취한다. 《모임 Gathering》은 사람들 사이의 사라져가는 연대감과 모임의 새로운 형태는 무엇일지 제시하는 자리가 된다. 이 글에서 박찬경의 전시 《모임 Gathering》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장 마지막에 언급하는 이유는 전시실에서 본 작품들이 하나의 주제로 통합될 수 없는 불확정성, 이질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시를 볼 때 박찬경의 문제의식이 그 틈을 비집고 나와 펼쳐지는 순간들이 있다. 작품 내부에서 혹은 작품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순간들이다. 각 작품은 박찬경의 주제의식을 위해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성에서 주제들을 ‘펼쳐 내보인다‘. 그것들은 관람자에게 어긋나고, 왜곡되고, 변형되며 전달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파편화되고 깨져버린 세계에서 가능한 모임/언어 역시도 그렇게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4. 참고문헌
MMCA 현대차 시리즈 2019: 박찬경 – 모임 GATHERING (2019.10.26 – 2020.2.23) 브로슈어
「비매개, 하이퍼매개, 그리고 재매개」, 『재매개』, 제이 데이비드 볼터, 리처드 그루신, 이재현 역,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모든 이미지는 옳다」, 남수영,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국립현대미술관, 2018.
「풍경의 (재)구성, 오톨리스 그룹의 <래디언트>」, 이한범, 오큘로 OKULO 001: 오디오비주얼리서치, 지식과 감각 사이에서, 2016.
「영화적 비디오 설치작품에서 영화와 비디오의 혼종화」, 김지훈, 현대미술사연구, 39, 7-4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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